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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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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우 수기

나의 아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슬며시 내 머리를 뒤흔든다. 시꺼먼 칠흑의 그림자가 내 눈 앞을 가리우는 순간, 이내 정신은 혼미한 상태로 들어간다. 난 무언지 모르는 형체 없는 로켓 같은 것을 타고 내 머릿속 같이 보이는 이 곳, 저 곳을 날아다니며 쏜살같이 어지러움 속으로 푹 빠져버린다. 머리 속은 경련으로 인해 순식간에 엉망이 된 채 심하게 뒤흔들린다. 무섭다. 고통스럽다. 한참 후 의식이 돌아오면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기가 어딜까” 궁금해 견딜 수 없어 한참을 생각해 보면 자리에 누워 있거나, 마루에 앉아있다. 잠시 동안의 경련에 맥은 풀리고 기운은 빠질 대로 바지고 공포감에 휩싸인다. 언제 이 발작은 또 나를 괴롭힐지... 가슴 속 또 한번의 시한폭탄이 언제 터져버릴지... 늘 익숙한 경련이지만 이렇게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지나갈 때도 있고, 그냥 어지럽다 말다를 반복하며 지나갈 때도 있다. 그렇지만 똑같이 남기는 상처가 있다. 가슴이 뜨끔하다는 것, 또 언제 오려나 하는 두려움. 몇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기운을 되찾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과 책 읽고, 놀며 시간도 보내지만, 오늘 찾아온 손님이 찜찜하다는 생각은 머리 속에 남아있다.

약은 참 많이 먹어왔다. 안 먹으면 발작조절이 안되니, 열 일 제치고 약 봉지부터 뜯는 게 일상이다. 8년을 먹었는데, 깨끗하게 조절이 안 되고, 언제까지 먹을지는 몰라도 먹어야 우선 안심이 되니 먹는다. 테그레톨, 사브릴, 오르필, 토파맥스. 내가 먹어본 익숙한 이름들. 음식이름처럼 친숙한 친구들이다. 8년을 내 몸 속에 넣어 두었으니, 그 양만 해도 참 많을 것 같다.

난 두 아이의 엄마다. 5살, 5개월 된 아들과 딸이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지만, 이런 소중한 아이를 갖기까지엔 아픔이 있었다. 의학상식이 부족해 신혼 초에는 약을 복용하고 아이를 가지면 위험하다는 생각만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2번의 낙태수술을 하고 본의 아니게 소중한 두 생명을 무참히도 짓밟게 되었다. 내 엄청난 잘못을 그저 약물 탓이려니 미뤄두고, 죄책감도 별로 갖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어떤 벌을 받아도 시원찮다. 정말 간질환자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까?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 채 방황할 때 어떤 산부인과의 나이 지긋하신 의사가 해주신 말씀. “간질환자라고 아이 못 갖는다면 말이 안 되죠. 많은 수의 환자들이 정상적인 분만을 하고 건강한 아이 갖습니다.” 하늘이 주신 희망의 메시지였다. 다시 임산부에게도 안전한 약물을 조절해 가며 무엇보다 마음에 부정적인 편견을 없앤 상태에서 나도 정상적인 귀여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신을 하고 2001년 첫째 아이를 낳았고, 올 5월에도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10달을 보내며 건강한 여아를 출산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보다 건강치 못했지만, 임신기간에도 의식을 잃는 발작을 여러 번 경험하고, 무수한 전조증상을 겪었지만, 남들은 꺼려진다고 감기약도 조심해서 먹는다지만, 임신기간 내내 약을 먹으면서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했고, 함께 도와준 가족들과 신경을 많이 써주신 신경과 선생님, 산부인과 선생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기도드린 하나님께서 나를 져버리지 않으시고 기도 들어주신 것에 감사했다.

두 아이를 낳고 모든 경련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러나 바람일 뿐. 아직도 의식을 잃는 발작이 자주 찾아온다. 식사를 하면서도 정신을 잃고 자리에 눕고, 가족과의 단란한 대화 중에도 얼굴을 찡그린 채 혼자 중얼거리며, 잠을 자면서도 어지러움에 시달리고, 심지어 길을 걷다가도, 집안이나 바깥이나 많이 의식을 놓치는 발작이 나를 사로잡는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되돌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답답한 마음만, 속 터지는 심정만 나를 짓누를 뿐. 남들이 중얼거린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뭘 중얼댔는지, 왜 눈은 멍하니 한 곳만을 쳐다보는지, 왜 멀쩡한 얼굴을 찡그리는지, 속된 말로 그놈의 지랄병은 왜 나를 이렇게 따라다니는지 이러다 길에서 쓰러지면 어떡하나, 5개월 된 아이를 안다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어떡할까.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또 찾아올지 모르는 발작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날 힘들게 해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려봤다.

약물로도 깨끗이 조절되지 않는다는 난치병. 작년에 너무 답답해 약물도 중단하고 기치료 라고 하는 ‘기’를 수련하시는 분에게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첨에는 신기한 마력에 끌린 듯 낫는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아무런 효험도 없이 다시 병원을 찾고 말았다.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할 병, 덮어두면서 쉬쉬 해야 하는 병...
참 서럽고, 마음 아프고 한스럽기도 하다. 때로는 친지들 조차 모르게 숨죽이고 가리워야 하는 병. 차라리 외상이라고 하면 창피한 마음도 덜 할 테고, 남들의 시선도 염려의 눈길이 될 텐데, 그저 숨기우고 가리워야 하는지. 아직도 사회통념이 우리 환자들을 밖으로 끌어주지 못함이 안타깝다. 오히려 환자 곁에 가는걸 기피하고, 무섭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환자가 당당히 병명을 밝히고, 도움을 청해야 할 병이 아닐까. 난 이제 당당히(?) 솔직하게 내 병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 비상시에라도 도움을 구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약물로 인한 치료가 어렵다고 하니 수술로의 치료를 받으려 한다. 꼭 완치되어 발작이 내 삶에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 건강한 몸으로 따뜻한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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