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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을 앓은 역사속 위인들

모파상




기 드 모파상(1850-1893)은 노르망디의 디에프 근처의 밀로메닐 성관에서 출생했다고 호적에 적혀 있으나 출생지에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다. 12살 되던 때 양친이 별거에 들어가는 바람에 어머니, 동생 에르베와 함께 에트르타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1863년에 이브트의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만에 퇴학, 소설가 플로베르를 스승으로 문학에 뜻을 두었다.

22세 때에 해군성에 취직이 되면서 파리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일요일마다 플로베르를 방문, 본격적으로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플로베르를 통해 에밀 졸라 등 문인들과 교유를 튼 것도 이때부터다.

1876년에 시 '물가'로 처음으로 시재를 인정받았으며 80년에 졸라가 주재하는 문집 <메당의 저녁>에 출세작 <비곗덩어리>를 발표했다. 간질 등 신경 계통의 병 때문에 알제리, 브루타뉴 등을 여행하는 틈틈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문명을 얻은 것은 장편 소설 <여자의 일생>(1883)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래 최고의 명작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는 러시아 태생의 여류 화가 마리 바시키르체프 등 연인을 여럿 두었으며, 장편 <벨 아미>의 성공으로 요트를 사서 '벨 아미'라고 명명한 후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간질과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장편 <죽음처럼 강하다> 등 히트작을 발표했으나 갑작스런 발작으로 친구들을 놀래키곤 했다.
1893년 7월 6일 기 드 모파상은 43세를 일기로 광기와 공포에 사로잡혀 파리 근교에 있는, 50년 전에 천재 시인 네르발이 입원한 적이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있어서 부동 또는 정체가 존재의 침몰이며 죽음이었던 이유 또한 그가 죽음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태생부터가 여전히 불분명한 그는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부모의 불화를 함께 나눠야 했고, 어머니의 신경질환을 감수해야 했다. 그가 20살이 되던 1870년에 보불전쟁이 터지자 그는 사병으로 전쟁을 체험해야 했으며, 26세란 젊은 나이에 심장질환과 포진으로 고통받았다.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정신적 환각증세로 시달렸으며, 그의 동생 에르베가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1887년부터 그의 작품에는 과속증(la dromomanie)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1888년 5월부터 간헐적으로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하던 그는 그 다음해인 1889년 11월 동생 에르베의 사망에 충격을 받는다. 1892년 그가 42세 되던 해에 3번이나 목을 매는 자살을 시도한 후, 그는 마침내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광기와 신경발작을 짐작이나 한 듯이 그는 1880년 「비계덩어리」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매우 풍요롭고 활발한 문학작업을 열정적으로 펼쳐 보였다. 6편의 장편, 3백여 편의 단편, 1백여 편의 시평을 씀으로써 작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이러한 모파상의 정력적인 문학활동은 그에게 너무나 빨리 엄청난 부와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때 그가 벌어들인 수입은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매년 1억 2천만 원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요트를 사서 자신의 작품 제목을 본 따 '벨아미'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는 그를 매혹시키면서도 그에게 혐오감을 안겨 주는 사회의 위선, 경박성, 소란함을 잊기 위해 하늘과 물 사이에서의 항해를 즐겼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추려고 했으며 플로베르처럼 작가라면 마땅히 자신이 쓴 작품 뒤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제나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던 모파상은 노르망디 근처에 별장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마치 수도를 하듯 자기 혼자만의 글쓰기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고, 사냥에 빠져들었다가 마음 내킬 때마다 요트 타기를 즐겼다. 또한 그 자신이 작품 속에서 태연자약하게 공언하고 있듯이 육체적인 사랑만이 그에게 유일한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가로서 번 돈을 대부분 거리의 창녀들에게 뿌리며 살았다. 모파상은 자신의 작품의 무대로 삼아 성공을 하면 그 장소를 떠나야 한다는 이상한 욕구에 떠밀려, 코르시카, 알제리, 튀니지, 이탈리아, 시실리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러나 진실로 그가 피하려고 애쓴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불안감이 점점 더 그를 고독 속으로 내몰았고 마침내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분열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문학이라는 고된 작업, 육체에의 탐닉, 과로를 이기려고 시작한 술과 몰핀과 마약으로 인한 무절제한 생활, 이 모든 것이 모파상에게 환각증상과 의지력 상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렇게 빨리 모파상을 황폐하게 만든 심각한 원인은 오랫동안 소홀히 하고 키워 온 매독이라는 병이었다. 이제 그 병으로 그의 정신과 육체는 파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건강한 그의 육체는 허약해지고 형편없이 된 것이다. 급기야 그는 스스로 자신의 동일성을 잃어버리고 타인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광기의 과정을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공포가 그로 하여금 자살을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893년 5월과 6월 간질발작을 일으키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겨우 정신을 차렸던 그는 그해 7월 6일 오전 9시에 사망하고 만다.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매독균에 의한 신경조직의 파괴였다.

모파상은 이렇듯 불과 10년이라는 기간에 엄청난 작품을 쓰면서 프랑스 문단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모파상 자신이 말하듯이, 그는 유성처럼 문학 인생에 뛰어들었다가 번개처럼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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