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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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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우 수기

구름은 잠시 태양을 가리고 있을 뿐

태종대의 자살바위 끝, 아슬아슬하게 서서 교복을 입고 바다 저 편을 보는 아이가 있었다.

‘저 넓은 바다품에 안기면, 어쩌면 내 부끄러운 모습이 완전히 감춰져 버릴지도 몰라.’

부서지는 파도 위로 사랑하는 아빠, 엄마, 언니, 오빠..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발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이 사람들을 볼 수 없겠지만, 난.... 괜찮아 질꺼야.’


중학교 때 처음 간질발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원인은 불분명 했으나 초등학교 때 외상이 없었던 교통사고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때 절대 싫다던 내 손을 잡고 8차선 도로를 뛰었던 친구, 그 친구가 손을 놓는 순간 난 도로 한복판에 남겨졌고 멀리서 달려오던 택시에 머리가 끼인 채 한참이 지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외상은 없었다. 그땐 그게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몇 년 뒤 찾아온 병은 지옥 같은 간질이었다. 차라리 그때 팔다리가 부러졌더라면 좋았을 건데.. 그렇게 몇 개월만 병원에 있다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난 나도 모르게 쓰러진 채 일어서게 되었다. 눈을 뜨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없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었고, 그 아픔보다 더 날카로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너무나 예민한 시기에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가혹하기만 했었다.
처음 간질 발작이 일어나고, 깨어나서 아빠의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에 갔었다. 그리고 뇌파 검사가 끝나고, 의사선생님의 간질이라는 진단을 내리셨다. 그때의 난 그게 어떤 병인지 몰랐었지만, 집에 오는 내내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아빠의 떨리는 어깨를 잊을 수 없다.

그 뒤로 발작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 난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20일에 한번 병원에 가야 하는 것도 너무나 싫었었다. 다른 아이들과 내가 뭐가 다른지도 모르는 데, 내가 어떤 병인지도 모르는데, 고쳐지는 건지 마는 건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들이 싫었다. 내가 발작을 일으킨 것을 본 사람들을 전이되는 병이라 생각한 듯 나에게 닿기 조차 꺼려했었다.

그들은 뒤에서 알 수 없는 수근거림을 했었고, 난 어느 순간 이건 철저히 비밀로 해야하는 병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나를 떠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내 병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나는 잠시 졸거나 할 때 발작이 일어나는 수면발작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그 어떤 외박도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상처 받지 않길 바라셨을 것이다. 난 그렇게 내가 가진 아픔을 철저히 숨긴 채 살아야만 했다. 혹여나 들킬까 혹여나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난 항상 불안해야 했다. 당연히 내 병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수학여행에 같이 가자고 할 때, 나 또한 안되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께 때를 썼다. 엄마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며 나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피우고 싶었다. 부모님 몰래 수학여행 등록비를 내고 수학여행을 갔었다. 2박 3일 내내 난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잠자는 동안에도 한쪽 구석에 앉아 허벅다리를 꼬집으며 울고 또 울었다.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을 주냐고..
그렇게 수학여행은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 되었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을 그렇게 잘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위기가 닥쳐왔다.
고 3 수험을 준비하는 나였지만, 엄마는 나에게 컨디션 유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밤을 새는 것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도 허락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나의 욕심은 그럴 수 없었다.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뒤지는 것이 싫어 밤늦게까지 몇 일 정도 공부를 했더니 학교에서 너무나 졸려 견딜 수 없었다. 쉬는 시간 잠깐 엎드려 있는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눈떴을 때 난 양호실에 눕혀져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미 학교 전체가 다 알게 되었을 내 병. 그리고 그동안 함께 지내왔던 친구들이 이전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피하고 수군대는 상상... 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교실로 돌아가지 않은 채 교문 밖을 향해서 태종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왜 태종대에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그곳에 자살바위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것 같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하염없이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그 친구가 원망스러웠고, 나를 이렇게 낳아준 엄마 아빠가 원망스럽고, 아무 병도 가지지 않았던 언니, 오빠 또한 미워졌다. 그리고 나를 경멸할 친구들이 떠올랐다.
뒤에서 또 얼마나 나를 욕할까.. 닿기조차 꺼려할 그들.. 난 울고 또 울면서 내가 없어지는 게 어쩌면 모든 이들에게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태종대 자살바위 위에 섰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호주머니 소지품을 바닥에 하나씩 내려 놓는데 핸드폰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켰는데, 너무나 많은 음성과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친구들이었다.
어디에 있냐고 걱정된다고.. 보는 즉시 연락 달라고.. 괜찮다고 걱정 말라는 친구들..
그 순간 또 핸드폰이 울렸다. 대체 어디냐며 울면서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난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울기만 울었다. 결국 나의 자살소동은 무산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 난 내 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 하는 내내 난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심판을 받는 죄인처럼 그들의 눈빛도 대답도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들은 나를 안아주었다. 왜 그동안 이야기 해 주지 않았냐며,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었다.

자신이 편도선염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친구가 디스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너 또한 그런 병중에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니 그렇게 힘들어 하지 말라고...
그렇게 난 그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 아이들과 자취를 시작해서 타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까지 7년째 같이 살고 있다. 이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나는 마음을 편하게 가져서 인지는 몰라도 발작의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한 달에 20일 이상을 하던 발작이 한 달에 한 두번 정도로 줄었고, 어쩔 때는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발작을 할 때마다 친구들은 달려와 나를 안아준다. 모두들 나와 함께 살지 시작하면서 간질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한 탓에 지금은 나보다 전문가가 되어있다. 나 때문에 귀찮고 힘들지 않냐는 말에 친구들은 자신이 감기에 걸리거나 하면 나 또한 자신의 머리에 수건을 놓아 주지 않겠냐며, 이건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친구가 말했다.

“내가 니병을 알고 너를 알았다면, 어쩌면 너와 친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를 알고 니 병을 알았기 때문에, 병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앞으로 니가 세상을 살아갈 때도 너를 아는 사람들은 니 병에 대해 알게 된다 해도 너를 사랑할 거야. 그러니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해 져.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니깐”

그 친구의 말처럼 나는 당당해 지기 위해 대학에 왔고 마지막 학기 수업을 들을 때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당당해 지기 위해 처음으로 내 병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나와 같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또한 아픔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속에서 내 간질이라는 병은 결코 모두가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닌 하나의 같은 아픔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말처럼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안아주었다.

아직 나는 간질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 아직도 내 병에 대해 몰랐으면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또한 여전히 피곤하면 발작을 하기에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하고, 한달에 한번은 병원에 꼭 가야 한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희망이 생겼다.

내 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난 더 이상 ‘간질’이라는 병에 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곧 다가올 완치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이다.

구름은 잠시 태양을 가리고 있을 뿐 태양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다. 희망이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송지환 2009.08.23
맞아요...간질을 기피하고 몹쓸병으로 분류하는 사회적인 생각부터 바꿔야하는데 정부가 협조를 해줘야 하는데... 아직 그 인구가 많지 않아서일까요?
안산댁 2010.01.23
간질인 딸을 둔 엄마입니다. 님에 글에 공감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한없이 눈물을 흘려 봅니다. 저의 딸은 상상을 할수 없을 정도로 심하거든요.
님의 밝고 긍정적인 생각이 언젠가 이 병을 이겨낼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권순우 2016.10.27
지인분들이 정말 마음이 넓고 대단하시네요 .. 저도 님처럼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야 최대한 이 병을 이겨낼 수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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