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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을 앓은 역사속 위인들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이마누엘 노벨과 카롤리나 노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이마누엘은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원래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알프레드와 3명의 남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 시절의 알프레드는 간질로 인해 병약한 편이었으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특히 폭탄에 관심이 많아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 한편 사업에 실패한 그의 아버지는 1837년 광산 발파용 폭탄과 공작기계를 제작해 성공하여 아들에게 개인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알프레드는 이미 16세에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된다.

알프레드 노벨은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장갑함 모니터호(號)를 만든 존 에릭슨 밑에 들어가 4년간 일한다. 그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알프레드는 크림 전쟁에 군수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회사는 증기선 부품 제작에 손을 댔으나 경영난에 시달리다 1859년 파산하기에 이른다.

알프레드는 부모와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온 직후 알프레드는 아버지 소유의 토지에 마련한 조그만 실험실에서 폭탄 제조 실험에 착수한다. 그 무렵 발견된 액체 폭탄인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성은 뛰어났지만, 휘발성이 강해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노벨은 1862년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기 위해 공장을 세우는 한편, 니트로글리세린의 약점인 이상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다. 그 결과 1863년 노벨은 금속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다음 목제 점화 플러그를 끼워넣는 방식을 사용해 실용적인 뇌관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간단히 말해, 점화장치에 설치한 소량의 흑색화약을 폭발시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 뇌관의 발명으로 노벨은 폭탄 제조자로서 부를 쌓아나가는 한편 발명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865년 노벨은 여기서 일보 전진해 '폭발성 캡슐'(blasting cap)이라는 뇌관을 발명한다. 폭발성 캡슐은 충격이나 적당한 열을 가하면 폭발하는 뇌산수은을 소형 금속용기에 채워 만든 뇌관으로, 이의 발명과 함께 고성능 폭탄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운반과 관리가 어려운 위험한 물질로 1864년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막내동생 에밀을 포함해 여러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노벨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산이 함유된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말리면 사용과 취급이 훨씬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이 새 제품에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나미스에서 따온 말)라는 이름을 붙여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특허를 받았다.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굴착공사, 수로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도 곧바로 사용되었다. 노벨은 유럽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제조공장을 세우는 한편, 자기가 만든 폭탄을 생산·판매하기 위한 기업 망을 구축한다. 이밖에도 노벨은 더 나은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 여러 가지 폭약을 개발한다. 또한 노벨은 폭탄 외에도 인조 비단이나 가죽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해 전세계적으로 총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따냈고 전세계에서 거두어들이는 이러한 수입과 남동생 루드비그와 로베르트에 의해 발견된 카스피 해 주변의 유전에 대한 자기 몫의 지분으로 노벨은 막대한 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노벨의 성격은 좋지만은 않았다. 노벨의 복잡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업 때문에 거의 1년 365일을 여행을 하면서 보내야 했지만, 노벨은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그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지가 번득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애보다는 발명을 더 좋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과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노벨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에다 자신이 발명한 폭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으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가 그 다음해인 1896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작성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두었던 유언장에서 노벨은 인도주의와 과학의 정신을 표방하는 자선사업에 늘 아낌없는 지원을 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 받고 있는 노벨상을 제정했다.
우리는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한 이유를 그저 추측할 따름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888년에 알프레드의 남동생 루드비그가 프랑스에서 사망하였는데 당시 프랑스의 한 신문에서 루드비그와 알프레드를 혼동하여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노벨이 이 때의 잘못된 사망기사를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후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상을 제정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상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 문학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상 설립과 관련해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걸출한 평화주의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교분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이렇게 노벨은 어려서부터 병을 앓았고 병 때문이지는 모르나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우울함을 보였던 환자입니다. 물론 그의 부친의 부로 인해 초기 교육환경이 좋은 편이었으나 이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특성일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환자의 굴레 속에 들어 있을 때 그는 발명을 하였고 이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노벨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노벨이 한 일을 똑 같은 인간이 우리가 못할 것은 없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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