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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을 앓은 역사속 위인들

도스토예프스키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시립병원의 의사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몹시 화를 잘 내며 까다로운 성격의 아버지와 신앙심이 돈독하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애정을 쏟는 어머니 슬하에서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6세 때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에게 살해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 W. 셰익스피어·J.B. 라신·J.C.F. 실러·E.T.A. 호프만·H. 발자크 등 서구문학을 탐독하였다. 이 당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을 발표하였는데 이 처녀작이 비평가 V.G.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아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이어서 《분신(分身, 1846)》 《여주인(女主人, 1847)》 《백야(白夜, 1848)》 등 몽상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

1847년경부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집단 <페트라셰프스키회(會)>에 참가하여 벨린스키가 N.V. 고골리에게 보낸, 러시아정교회를 비판한 편지를 낭독한 것이 주요 죄상(罪狀)이되어 동년 12월 총살형을 언도 받았지만, 집행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4년의 징역형과 그 후의 병역의무로 감형되었다. 이 <모의사형(模擬死刑)>의 체험은 《백치(白痴, 1868)》에 생생하게 씌어져 있다.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복역했는데, 그 체험에 관해서는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이 무렵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54년 2월 출옥, 세미팔라틴스크의 수비부대에 배속되었는데, 그곳에서 알게 된 M. 이사예바와 57년에 결혼하고 문단복귀를 꾀하여 집필을 재개하였다. 이후 형 미하일과 잡지 《시대(Vremya)》를 발간, 《학대받은 사람들(1861)》 《죽음의 집의 기록》을 연재하고, 또 시평(詩評)으로 논단에서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62년 처음으로 서구 여러 나라를 여행,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수필(1863)》을 발표하였고, 서구문명이 <죽음에 이르는 문명>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하였다. 한때 룰레트 도박에 빠졌는데, 그 경험은 당시의 A. 수슬로바와의 연애와 함께 《도박자(1866)》의 소재가 되었다. 64년 아내 마리아가 죽고 잇따라 형 미하일이 죽었으며, 《지하실의 수기》를 발표하여 동시대의 합리주의적 진보파에 대항하였다. 66년 《죄와 벌》을 발표, 문명(文名)을 떨쳤다.

67년 《도박자》의 속기자 A. 스니트키나와 결혼하고, 함께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후 4년간 제네바·피렌체·드레스덴 등지를 전전하면서 《백치》 《영원한 남편(1870)》 《악령(1872)》을 썼다.

71년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와, 72년 주간지 《시민(Grazhdanin)》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작가일기(1876∼77, 1880∼81)》를 연재하였다. 이 무렵부터 점차 생활이 안정되었다.

75년 《미성년》을 발표하고 76년부터 월간 개인잡지 《작가일기》를 발행하였다.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Bratya Karamazovy, 1879∼80)》과 《작가일기》로 <국민의 교도자(敎導者)>라는 위치에 섰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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